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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394, 통역잔혹

내얘기 2019. 4. 11. 15:36

 감기에 걸려본 게 아마 전역 이후론 처음이었을 것이다. 이번 감기는 정말 길게 이어졌다. 오늘로 6일째 골골댔다. 아까 오전에 일본인 환자의 사랑니 발치 치료를 통역하는 도중이었다. 원장님께서 편하게 사랑니를 발치할 수 있게 환자에게 턱을 숙이고 입을 크게 벌려줄 것을 몇 번이나 전달했지만 환자는 불안하고 무서웠는지 계속해서 턱을 올리고 양팔을 올리는 등 위험한 반사반응을 보였다. 원장님은 예민해진 상태. 그리고 환자 또한 불안해진 상태. 환자는 이내 싱코큐라는 단어를 언급하며 치료를 중단할 것을 요구했다.


 싱코큐의 뜻은 심호흡. 아까 입을 크게 벌려달라고 할 때마다 불편함을 호소했던 것을 토대로 나는 원장님께 환자가 호흡을 힘들어한다고 전달했다. 원장님은 알고 있다며 숨 쉬는 게 어떻게 불편하냐고 물어 달라 하셨고, 나는 곧바로 그 의미를 환자에게 전달했으나 환자는 ?” 라고 답했다. 아찔하고 긴박함이 들끓던 진료실의 공기가 순식간에 바람 빠지는 풍선 마냥 매가리 없게 흐르기 시작했다. 이른바 갑분싸’. 원장님은 고개를 돌리며 나지막이 한마디 하셨다.


 “현호 불러 와.”


 현호는 일본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나의 사수다. 사수가 곧바로 진료실로 들어오더니 환자와 대화하기 시작했다. 나는 속으로 되뇌었다.


 “제발 사수와도 말이 통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왜냐하면 사수가 진료실로 들어와서 모든 상황을 단번에 정리하게 되면 그만큼 나의 무능함이 극대화될 것 같았다. 이곳에서의 직장생활이 벌써 1년이나 지났는데 내가 아직도이것밖에 안 되는 사람으로 보인다는 것은 도저히 자신에게 용납되지 않았다. 그래서 사수도 제발 이 환자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길 바랐다. 그러나 사수는 금세 원장님에게 환자의 의사를 전달했다. “환자분이 잇몸을 절개해서 치아를 뽑는다고 들었는데 지금 잇몸을 절개하고 있는 게 맞는지 궁금해 하신다.” 그 순간, 모든 상황은 깔끔하게 정리되었다.


 그러자 나는 한순간에 머릿속이 새하얘지면서 눈앞의 모든 것이 뿌옇게 보이기 시작했고 혈압이 급격히 오르면서 온 몸에서 피가 빨려나가는 듯한 아주 이상한 느낌이 몸 전체를 휘갈기기 시작했다. 이내 다리에 힘까지 풀렸다. 당시 더 이상 내가 정신을 다잡지 않으면 그 순간 발치가 진행되는 환자의 얼굴 위로 몸이 쓰러질 것만 같았다. 나는 어떻게든 정신줄을 부여잡으며 발치가 끝나는 순간까지 남은 통역을 진행했다. 내가 환자에게 젠부 오와리마시따.(전부 끝났습니다.)” 라는 말을 건넴과 동시에 나는 마라톤이라도 뛰다 온 사람 마냥 양 손으로 무릎을 부여잡으며 허리를 숙이고 거칠게 호흡했다.


 나는 몸을 비틀거리며 직원실로 들어왔고 책상에 양 손을 짚고서 식은땀을 흘렸다. 동료들은 갑자기 왜 그러냐며 나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동료들은 내게 휴게실에 가서 누워 있다 오라며 나를 달랬지만 근무 시간에 쉬기 위해 누워 있는 행동 또한 나 자신에게 용납되지 않아서 나는 어떻게든 인포메이션 데스크를 지키려 했다. 그러나 실장님의 지시가 강하셨고, 나 또한 더 이상 고집을 부릴 힘이 남아있지 않아서 말없이 물리치료실로 들어가 잠에 들었다. 그렇게 점심시간까지 반납하고 두 시간이나 잠에 들었다. 나는 잠에 들면서도 나의 부족한 일본어 실력 탓에 발치를 진행하던 원장님과 치위생사 스태프, 환자, 사수가 고생한 것이 미안해서 계속해서 내 자신을 질책하고 괴롭혔다. 심리적인 스트레스로 쓰러질 것 같은 기분을 느껴본 것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두 시간 뒤, 잠에서 깨어나 비몽사몽한 상태로 휴게실에서 동료가 사 온 김밥을 먹으며 정신을 회복하는 도중이었다. 치위생사 동료들은 내가 지속되는 감기 탓에 기운을 잃은 걸로 보고 내과에 가서 수액이라도 맞고 오라고 했지만 나는 괜찮다고 말하며 김밥을 먹었다. 오후가 되고 정신이 돌아왔을 때, 나는 사수에게 찾아가 하구키(잇몸) 외의 다른 잇몸이란 단어를 물어보며 아까의 내 입장을 털어놓았다. 솔직히 아직도 망설이면서 통역하냐고 혼날 줄 알았는데 사수는 이렇게 또 하나를 배워간다고 생각하라며 도리어 나를 달래주었다.


 그 때, 한 동료가 말했다. “그래도 동생 김밥은 현호가 사 가야겠다고 하더라~” 그게 무슨 말인지 순간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아서 그 말을 다시 되물었더니 동료는 내가 먹은 김밥을 사 온 사람이 바로 내 사수였다고 말해 주면서 왜 너는 이런 거 이해하는 게 한 템포 느리냐며 웃으며 다그쳤다. 나중에 다른 동료에게 물어보니 오늘 점심은 분식집에서 먹지도 않았다고 했다. 얼마 전, 사수 생일선물로 모히또 담배 한 보루를 사 드렸는데 오늘로 다 피웠다고 했다. 조만간 사수 책상에다가 또 한 보루를 리필해 놓아야겠다


 오늘은 입사한 지 394일째 되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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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hoi0w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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