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얘기'에 해당되는 글 8건

  1. 2019.04.11 D+394, 통역잔혹
  2. 2019.03.03 막내와 순두부
  3. 2018.03.06 교복을 벗고
  4. 2017.08.15 어른아이
  5. 2017.08.15 나를 설레게 하는 것들
  6. 2017.04.18 사랑하는 내 선생님
  7. 2017.03.20 일꺾을 맞이한 그들의 어느 2월의 술자리 1
  8. 2017.03.17 죽음을 맞이할 때

D+394, 통역잔혹

내얘기 2019. 4. 11. 15:36

 감기에 걸려본 게 아마 전역 이후론 처음이었을 것이다. 이번 감기는 정말 길게 이어졌다. 오늘로 6일째 골골댔다. 아까 오전에 일본인 환자의 사랑니 발치 치료를 통역하는 도중이었다. 원장님께서 편하게 사랑니를 발치할 수 있게 환자에게 턱을 숙이고 입을 크게 벌려줄 것을 몇 번이나 전달했지만 환자는 불안하고 무서웠는지 계속해서 턱을 올리고 양팔을 올리는 등 위험한 반사반응을 보였다. 원장님은 예민해진 상태. 그리고 환자 또한 불안해진 상태. 환자는 이내 싱코큐라는 단어를 언급하며 치료를 중단할 것을 요구했다.


 싱코큐의 뜻은 심호흡. 아까 입을 크게 벌려달라고 할 때마다 불편함을 호소했던 것을 토대로 나는 원장님께 환자가 호흡을 힘들어한다고 전달했다. 원장님은 알고 있다며 숨 쉬는 게 어떻게 불편하냐고 물어 달라 하셨고, 나는 곧바로 그 의미를 환자에게 전달했으나 환자는 ?” 라고 답했다. 아찔하고 긴박함이 들끓던 진료실의 공기가 순식간에 바람 빠지는 풍선 마냥 매가리 없게 흐르기 시작했다. 이른바 갑분싸’. 원장님은 고개를 돌리며 나지막이 한마디 하셨다.


 “현호 불러 와.”


 현호는 일본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나의 사수다. 사수가 곧바로 진료실로 들어오더니 환자와 대화하기 시작했다. 나는 속으로 되뇌었다.


 “제발 사수와도 말이 통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왜냐하면 사수가 진료실로 들어와서 모든 상황을 단번에 정리하게 되면 그만큼 나의 무능함이 극대화될 것 같았다. 이곳에서의 직장생활이 벌써 1년이나 지났는데 내가 아직도이것밖에 안 되는 사람으로 보인다는 것은 도저히 자신에게 용납되지 않았다. 그래서 사수도 제발 이 환자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길 바랐다. 그러나 사수는 금세 원장님에게 환자의 의사를 전달했다. “환자분이 잇몸을 절개해서 치아를 뽑는다고 들었는데 지금 잇몸을 절개하고 있는 게 맞는지 궁금해 하신다.” 그 순간, 모든 상황은 깔끔하게 정리되었다.


 그러자 나는 한순간에 머릿속이 새하얘지면서 눈앞의 모든 것이 뿌옇게 보이기 시작했고 혈압이 급격히 오르면서 온 몸에서 피가 빨려나가는 듯한 아주 이상한 느낌이 몸 전체를 휘갈기기 시작했다. 이내 다리에 힘까지 풀렸다. 당시 더 이상 내가 정신을 다잡지 않으면 그 순간 발치가 진행되는 환자의 얼굴 위로 몸이 쓰러질 것만 같았다. 나는 어떻게든 정신줄을 부여잡으며 발치가 끝나는 순간까지 남은 통역을 진행했다. 내가 환자에게 젠부 오와리마시따.(전부 끝났습니다.)” 라는 말을 건넴과 동시에 나는 마라톤이라도 뛰다 온 사람 마냥 양 손으로 무릎을 부여잡으며 허리를 숙이고 거칠게 호흡했다.


 나는 몸을 비틀거리며 직원실로 들어왔고 책상에 양 손을 짚고서 식은땀을 흘렸다. 동료들은 갑자기 왜 그러냐며 나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동료들은 내게 휴게실에 가서 누워 있다 오라며 나를 달랬지만 근무 시간에 쉬기 위해 누워 있는 행동 또한 나 자신에게 용납되지 않아서 나는 어떻게든 인포메이션 데스크를 지키려 했다. 그러나 실장님의 지시가 강하셨고, 나 또한 더 이상 고집을 부릴 힘이 남아있지 않아서 말없이 물리치료실로 들어가 잠에 들었다. 그렇게 점심시간까지 반납하고 두 시간이나 잠에 들었다. 나는 잠에 들면서도 나의 부족한 일본어 실력 탓에 발치를 진행하던 원장님과 치위생사 스태프, 환자, 사수가 고생한 것이 미안해서 계속해서 내 자신을 질책하고 괴롭혔다. 심리적인 스트레스로 쓰러질 것 같은 기분을 느껴본 것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두 시간 뒤, 잠에서 깨어나 비몽사몽한 상태로 휴게실에서 동료가 사 온 김밥을 먹으며 정신을 회복하는 도중이었다. 치위생사 동료들은 내가 지속되는 감기 탓에 기운을 잃은 걸로 보고 내과에 가서 수액이라도 맞고 오라고 했지만 나는 괜찮다고 말하며 김밥을 먹었다. 오후가 되고 정신이 돌아왔을 때, 나는 사수에게 찾아가 하구키(잇몸) 외의 다른 잇몸이란 단어를 물어보며 아까의 내 입장을 털어놓았다. 솔직히 아직도 망설이면서 통역하냐고 혼날 줄 알았는데 사수는 이렇게 또 하나를 배워간다고 생각하라며 도리어 나를 달래주었다.


 그 때, 한 동료가 말했다. “그래도 동생 김밥은 현호가 사 가야겠다고 하더라~” 그게 무슨 말인지 순간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아서 그 말을 다시 되물었더니 동료는 내가 먹은 김밥을 사 온 사람이 바로 내 사수였다고 말해 주면서 왜 너는 이런 거 이해하는 게 한 템포 느리냐며 웃으며 다그쳤다. 나중에 다른 동료에게 물어보니 오늘 점심은 분식집에서 먹지도 않았다고 했다. 얼마 전, 사수 생일선물로 모히또 담배 한 보루를 사 드렸는데 오늘로 다 피웠다고 했다. 조만간 사수 책상에다가 또 한 보루를 리필해 놓아야겠다


 오늘은 입사한 지 394일째 되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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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내와 순두부

내얘기 2019. 3. 3. 10:24

 한 동료의 연차와 예약 없이 당일로 내원한 환자들의 과밀로 인해 오버타임이 나고 말았다. 지칠 대로 지쳐서 물미역이 되어 있는 그 날의 나에게 사수는 같이 퇴근을 하자고 말했다. 이내 사수는 내게 약속이 있는 것이 아니면 같이 저녁을 먹고 가도 되겠냐고 물었다. 나는 흔쾌히 동의했다. 사수는 순두부를 맛있게 하는 식당을 알고 있다며 강남역 센트럴에비뉴의 지하상가로 나를 안내했고, 그렇게 나는 사수와 처음으로 사석에서의 식사를 함께 하게 되었다.

 

 대화의 화두는 나의 퇴사였다. 나는 학교 복학과 어학 시험을 준비하기 위한 시간을 빌미로 근 몇 달간 퇴사를 고민했다. 그러다 몇 주 전, 상사와 실업급여에 대한 내용을 나누던 중, 그것을 왜 궁금해 하냐는 상사의 질문에 나는 앞에서 언급한 내용들을 이유로 4월 말까지만 현재의 직장에서 근무를 희망한다는 의사를 밝히게 되었다.

 

 이 날, 나의 사수는 술이 몇 잔 들어가지 않았음에도 내가 받아들이기엔 심히 과분했던 말들을 수도 없이 건넸다. 사수는 내가 퇴사를 한 이후 새로운 사람이 채용되었을 때, 새로운 사람에게 이 직장에서의 업무들을 새로 가르쳐야 하는 부담보다 정들었던 사람이 떠난다는 현실이 더 부담이라며 나의 퇴사를 말렸다. 그러면서도 나중에 가령 어학 시험에서 좋지 않은 결과를 얻게 되었을 때, 결과의 이유가 직장이 되어 버리면 나에게 미안한 제안을 건네 버린 것이 되니 내가 퇴사를 하게 되어도 사수는 그것을 수긍하면서 뒤에서 묵묵히 나의 앞날을 응원해 주는 게 자신의 역할인 것 같다며 빈 잔에 술을 채워 주었다.

 

 지금까지 나는 기존의 동료들이 이루어 놓은 끈끈한 팀워크의 울타리에서 한 명이 탈퇴하려고 할 때, 그저 겉으로 보이는 이탈과 중단이라는 이미지에 얽매여 항상 불화, 퇴출과 같이 부정적인 이유로만 연관지어 생각하곤 했다. 그러나 나의 퇴사를 두고 진심으로 아쉬워하는 사수를 보며 당장의 끝이 영원한 끝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탈퇴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 동료들로부터 응원과 격려를 받으며 끝을 맺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사람을 행복하게 또는 강하게 만들어 주는지까지도 알 수 있었다.)

 

 나는 식사만으로 이 시간을 끝맺고 싶지 않아서 사수에게 장소를 옮겨 2차를 이어가자고 권했다. 사수는 내게 전역 후의 금연은 잘 지키고 있냐며, 친구들 만나서 술 마실 때 한 번 쯤은 담배를 핀 적이 있지 않냐며 은밀하게 유도심문을 건넸다. 나는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다고 생각되어서 술이 들어갈 때는 가끔 한 두 대씩 피는 편이라고 솔직하게 말했다. 사수는 반전있는 대답에 놀랐는지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리며 갖고 있던 담배를 내게 건넸다.

 


<에필로그>


 사수와 순두부 식당에 막 들어갔을 즈음, 사수가 어머니와 통화를 나눌 때였다.


 “엄마, 저 밥 먹고 들어갈게요.”

 “누구랑 먹는데?”

 “, 우리 막내랑 같이 저녁 먹기로 해서.”

 

 나는 막내라는 단어가 너무 좋다. 막내 포지션은 몇 년 만이다.

 

 입사 초기, 부족한 일처리에 대한 꾸지람을 들을 때는 막내라는 이유로 더 호되게 혼나기도 했다.

그러나 동료들과 가까워지고 일처리를 인정받고 난 이후에는 밤새 클럽 갔다가 술 덜 깨서 출근해도

막내라는 이유로 그럴 때다.”, 어린 거 언제 까지 가나 봐라.” 소리 듣는다.

가끔 대담한 말장난을 건네기라도 하면 어디 여섯 살 차이 나는 누나한테!”라며 팔뚝 스매싱 맞기도 한다.

 

 예전에는 하고 싶지 않아서, 이 일에 대한 자신이 서지 않아서 그만두고 싶었던 적이 많았다.

그러나 이제는 계속해서 하고 싶음에도 불구하고 퇴사라는 선택을 내릴 수밖에 없어서 가슴 한 쪽이 아려오고 괴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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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복을 벗고

내얘기 2018. 3. 6. 16:04

01.

아메리카노에 담겨있던 얼음이 없어졌다는 것은 둘 중에 하나다.

 

얼음을 입안에 넣어 깨 먹었다던가,

카페에 있던 시간이 오래되어 얼음이 모두 녹아 버렸다던가.

 

우리는 후자에 해당되었다.




02.

3, 그리고 우리.

결국엔 학교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얼음이 녹은 후,

2014년의 추억이 깃들어 있는 모교로 발걸음을 옮겼다.

 

교문을 들어서자마자 절로 나온 졸업생들의 단골 멘트.

우리 땐 이런 거 없었는데.”

지나간 시간의 흐름을 실감하며 나이를 떠올리니

어느 덧 우리는 스물 셋이었다.




03.

가끔 이런 생각을 해.

우리가 원래 40살의 날들을 살아가고 있는데 잠에 들었어.

그 잠에서 깼더니 지금 현재 우리의 모습이야.

그러면 너는 어떻게 살래?”

 

이 질문에 사실적 근거는 없지만

사실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끊이지 않았던 것은 왜일까.

 

너가 요즘 힘들어서 그런 생각 하는 거야.”


친구의 질문에 애써 코웃음을 치면서 고개를 가로저었지만

마냥 그 질문을 가볍게 흘려 넘길 수만은 없었다.

 

그만큼 학창시절은 누구에게나

자신의 인생을 장식하고 있는 수많은 밀리언조각 중에서

가장 소중한 조각임이 분명할 테니까.




04.

이 날, 나는 친구에게 한 편의 뮤직비디오를 소개해 주었다.

 

내게 건넸던 그 질문이 이 뮤직비디오의 시나리오가 되었기 때문에,

그리고 이 뮤직비디오를 보면 분명 과거로의 시간여행을 떠나게 될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근 몇 년간 느껴보지 못했던 특별한 여운에 취해

당분간은 길을 걷다가 내가 졸업한 모교의 교복 입은 학생들을 보면

괜한 기분 탓에 고개를 숙이며 멋쩍게 씩 웃는 날들이 많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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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아이

내얘기 2017. 8. 15. 09:50

선임의 전역이 아쉬운 나머지 눈물을 흘리는 인간을 보았다.

누군가의 이별을 아쉬워할 사람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어떤 대답보다 강하게 전달되었을 눈물이 향하는 대상.

절로 가슴 속의 꽃봉오리가 만개하는 듯 따뜻한 현장을 보았는데도 적응은 되지 않았고

계속해서 상황이 벌어지는 공간 속에서 머리를 긁적이며 회피할 궁리만을 하고 있었다.

 

돌아보면 늘 남보다 못한 사이를 초래하고 이별을 치러 냈다.

나는 항상 마무리를 아름답게 하지 못해

행복했던 시간을 대화와 맥주 한 잔으로 회고하고 싶어도 버젓이 추억할 수 없었다.

결국엔 이별한 대상의 뒷담화로 이어지고 말았다.


인간관계의 진가는 이별에서 발휘한다는 것을.

 

그것을 강산이 두 번이나 바뀌고 나서야 알았다.

그것을 스물이나 넘기고 나서야 알았다.

성장한 척, 의연한 척, 담대한 척 해도 결국엔 이제껏 어른아이였음을.


폭염 꺾는 여름비 내리던 어느 8월의 중턱에서.


-


2017.08.01 영규 전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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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신, 한 번도 먹어본 적 없는 물회, 은근한 애무,

공기의 맛조차 가늠되지 않는 먼 나라 모로코의 풍취,

2년 뒤의 내 모습, 앱솔루트 보드카가 혀에 닿을 때 전해질 미각의 여운,

일본인과 대화가 통할 때,

엄마 목소리, 외로이 불 켜진 꼭두새벽의 편의점, 빵집에서 생일 케이크를 고를 때,

묘한 유대감이 흐르는 사람과 다리를 꼬고 앉아 피우는 담배,

강지영, 아카니시 진, 나츠이로, 야마자키 마사요시,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정처 없이 걷는 순간, 내 이름을 이미 외운 초면인,

나의 신청곡을 소개하는 라디오 DJ, 여권 속의 입국 허가 도장,

영화 엔딩 크레딧, 처음 와 본 지하철역, 고속도로 톨게이트.

시간이 멈췄으면 하는 생각이 들 때, 그 자리를 채우고 있는 사람들.


- 나를 설레게 하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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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hoi0w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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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누구도 못 말린다는 중학교 2학년 때의 추억을 헤집어보면 그녀의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그녀는 당시 같은 학년 모든 친구들의 관심대상이었고 베이비 페이스에 도도하기까지 했다.

복도에 등장만 하면 모두가 그녀로부터 따뜻한 말 한 마디라도 건네받고자 아등바등 대곤 했다.

그녀가 친구들에게 웃으며 인사를 되받아 건네면 나는 괜히 조바심이 나기도 했고 그런 친구들을 시샘하곤 했다.

 

 나는 그녀와 같은 반이었다.

그녀는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해서 수학여행이라도 가면 늘 친구들의 사진을 찍어주며 선한 미소를 보였고

학급을 위해 음식 만들어 먹는 자율 활동 시간도 자주 제의하곤 했다.

그러면서도 가끔은 시크하게 친구들을 제압하는 은근한 카리스마도 지니고 있었다.

평소에는 말수도 별로 없고 얌전히 텀블러에 따뜻한 차를 우려 마시던 그녀였는데 그녀의 책상은 고양이 사진으로 꾸며져 있었다.

그런 그녀를 보며 나는 생각했다.


 “, 선생님은 고양이를 좋아하시는 구나.”


 스승의 날이 되면 나는 중학교 2학년 때의 선생님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SNS를 보니 선생님은 지난 5년 사이에 결혼을 하셨다심지어 예쁜 딸아이의 엄마가 되어 육아휴직까지 낸 상태셨다. 내가 학창시절 좋아했던 선생님이 결혼을 한다는 걸 알았을 때, 생각보다 슬프지는 않았다어쩌면 선생님과 나는 애초부터 진실된 사랑으로 연결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일지도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님의 애제자가 되고 싶어 발버둥쳤던 지난 날들은 또래들의 사이에서 내가 선생님과 가장 인연이 두텁다는 것을 과시하고 싶었던 풋풋한 욕심 때문이었던 것 같다.


 중학교를 졸업한 지도 어연 5년 전이다. 가끔 스승의 날을 빌미로 만남을 기약하는 메시지라도 보내면 선생님은 늘 육아를 이유로 지금은 시간을 낼 수 있는 시기가 아니라며 연신 미안해하셨다. 그리고 입대를 앞두고 있던 5월 중순의 어느 날. 올 해에도 스승의 날을 빌미로 선생님에게 입대까지 언급해가며 티 나지 않게 만남의 승낙을 구걸하고 있었다. 이번에도 선생님으로부터 만날 수 없다는 연락을 전해 받으면 앞으로는 만남을 기약하는 메시지도 눈치껏 보내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내 답장이 도착했다. 선생님은 만날 수 있다고 답장하셨다. 그렇게 사제지간의 상봉(?)4년 만에 성사되었다.

 

 약속 장소에 나타난 선생님의 모습이 7년 전과 비교하면 많이 변해 있었다. 7년 전의 미모는 여전했지만 육아로 인해 과거보다는 많이 수척해지셨고 도도했던 말투보다는 활기찬 말투가 더 몸에 배신 듯 했다. 성인이 된 이후에 만나서인지 나와 선생님은 대화의 사이에 인간미가 넘치는 욕도 조금씩 섞어가며 대화를 이어갔다. 바르고 고운 우리말을 가르치던 국어 선생님이, 심지어 ‘국어계의 여신이라는 별명을 달고 계셨던 선생님이 내 앞에서 욕이 섞인 말을 하고 있다. 7년이 지난 지금도 선생님의 입덕 포인트는 여전히 많은 여지를 두고 있었다.


 그런데 머지않아 선생님과 나 사이에는 어색한 정적이 드문드문 올라오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선생님과 잦은 소통이 없었던 지난 7년간 내가 일본어에 시도했던 이유들과 대학 입학에 지니고 있는 비관적인 생각들을 허물없이 이야기를 하기에는 그동안 내가 겪은 다양한 에피소드나 그와 관련한 긴 비하인드 스토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7년 전, 나의 담임선생님이던 그 시절의 이야기를 계속해서 이어가기에는 소재도 슬슬 고갈되어 한계점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내색은 하지 않았다. 내가 좋아했던 선생님과 나 사이를 어색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기에. 그럴 즈음에 나는 선생님에게 학교 복직을 축하하는 의미로 고양이 그림이 그려진 에코백과 따뜻한 차를 우려 드실 수 있는 텀블러가 담긴 선물 박스를 양 손에 안겨 드렸다.


 

 이 날, 나는 선생님과 건강한 군 복무를 약속하며 작별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생각에 잠겼다. 내가 좋아했던 그 시절의 선생님과 지금의 선생님은 꽤 다른 모습이었다. 반가웠던 홧김에 초반의 대화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웠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선생님과 나는 7년 전의 모습이 서로에게서 보이지가 않았다. 7년 전의 나는 해맑은 순수함을 지니고 아무렇지 않게 선생님을 찾아가 국어 1등을 받겠다는 당찬 약속도 걸 수 있는 대담함과 용기가 있었지만 입시 전쟁을 겪고 짧게나마 겪어본 사회생활의 탓인지 나는 7년 전처럼 아무렇지 않게 선생님에게 다가갈 수 있는 뻔뻔함을 잃어버리고 말았다선생님도 어쩌면 예전처럼 다가왔던 7년 전의 나를 기억하고 계셨기 때문에 약간의 어색함과 정적이 존재했던 건 아닐까 싶다. 


 

 그렇지만 지금도 나는 선생님을 너무나 사랑하고 존경한다. 그러나 이제는 억지로 선생님에게 만남을 구걸하거나 연례행사와도 같은 형식적 연락을 건네고 싶지 않아졌다. 굳이 그러지 않더라도 선생님은 지금쯤 쉬는 시간이 되면 내가 드린 텀블러에 차를 우려 드실 테고, 수업 종이 치면 하얀 고양이 에코백에 수업 준비물을 한아름 챙겨 수업의 교실로 향할 모습이 머릿속에서 그려지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모습이 연상되는 것만으로도 나는 선생님을 만나지 않아도 배부르다. 도리어 영화 <써니>에서 나미와 선생님이 만났던 주름 자글한 상태가 된다면 또 어떨지 모르겠지만.


 7년 전,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으면서도 정말로 좋아했던 내 선생님. 사제지간의 애정이란 게 무엇인지 정의하게끔 일깨워주고 학급 일기를 통해 서른 명의 학생들과 소통하고자 했던 내 인생의 선생님. 사춘기 시절, 친구들하고 노는 것이 더좋았던 나에게 자기주도적 학습법을 알려 주시며 공부할 수 있게 해 주셔서, 그렇게 또 평균 성적을 16점이나 올릴 수 있어 감사했고, 무엇보다도 성인이 된 지금도 기억할 수 있는 선생님이 되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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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꺾 : 군 장병 계급별 복무 기간을 월별(호봉)로 나누었을 때, 일병의 계급이 5개월 차에 접어드는 시기


 육군 21개월의 복무기간을 기준으로 계급별 복무 기간은 3개월(이등병), 7개월(일병, 상병), 4개월(병장)으로 나뉜다. 7개월 간 달게 되는 일병, 상병의 시기에는 그 절반이 되는 4개월 차(4호봉)가 지난 5개월 차(5호봉)부터 해당 계급으로서의 남은 기간이 꺾였다고 표현하여 일병 꺾이는 시기, 축약해서 일꺾이라 칭하곤 한다. 고로 상꺾의 경우에는 상병 5개월 차인 상병 5호봉 때를 말한다.


 생애 처음으로 사석에서 전우의 관계를 맺은 인간과 술자리를 가졌다. 8개월 전만 해도 쭈뼛쭈뼛 어색하게 존댓말은 건네던 우리가 이제는 반말의 왕래가 너무나 당연시하고 자연스럽다. , 전역 이후의 버킷리스트까지 구상해보는 사이가 될 정도로 우리의 정은 두터워졌다. 기온이 영하권을 웃돌 정도로 매섭지는 않았지만 얇게 입고 다니기엔 너무나 추웠던 그 해 끝겨울의 어느 날. 그들은 40분처럼 짧게 느껴졌던 네 시간동안 아담한 맥주바에서 쉴 새 없이 맥주병을 부딪치며 그렇게 깊어져 가고 있었다.

 

 이 날의 로케는 후권이가 살고 있는 시흥동이었다. 위치상으로 후권이에게 편위된 곳이었지만 의외로 이것은 나의 의견이 반영된 결과였다. 시흥동에서 만나야 하는 특별한 이유는 없었지만 내가 그 곳으로 일부러 시간과 이동 거리를 할애하면서까지 가겠다고 한 이유는 오로지 가 보지 않았던 곳에 족적을 남기고 싶은 개인적인 유랑 욕구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것도 운명이라면 운명인 걸까. 그 곳은 내가 3년 전, 음악마케팅 분야에 몸을 담고 있을 때 친하게 지냈던 가수 지망생 형의 웨딩홀 축하 공연을 응원하기 위해 한 번 다녀온 적이 있던 곳이었다. , 그 웨딩홀을 경유해야 갈 수 있는 문일고등학교는 후권이의 모교이기도 했다. 아슬아슬하게나마 일치했던 평행이론 덕분에 우리는 연신 하이파이브를 하기 바빴고 그것은 우리의 술자리를 더 밝은 조명으로 비추어 주고 있었다.

 

 이 날의 만남이 너무나도 값진 시간이었다고 느낀 건 후권이의 매너가 한 진가를 했다. 나는 일회성 만남을 싫어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나는 추후의 만남을 기약하는 멘트를 건네는 데 항상 서투르다. 그것은 곧 고민이기도 했다. 그래서 몇 시간 후 오늘의 만남의 시간이 종료되고 후권이와 작별을 할 때, 나는 어떤 인사로 마무리를 지어야 할지 내색 없이 망설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 망설임의 시간은 얼마 가지 않아 금세 무색해지고 말았다. 그것은 바로 후권이가 나에게 제안한 위시리스트가 있었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그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하나는 전역 이후의 훗날, 서로의 커플들끼리 오사카에서 더블 데이트를 하자는 것이었다. 서로가 각각 중국어와 일본어에 일가견이 있는지라 훗날의 해외여행을 기약하는 건 어쩌면 그 누구보다 쉬웠을 지도. 나는 그 날의 통역을 책임지기로 했다. 더군다나 오사카는 이미 나에게 지견이 있는 곳. 그 제안을 수락하는 건 거절할 여지가 없을 정도로 너무나도 당연했다. 그렇게 우리는 한 번 보고 말 일회성 만남의 여지를 간단하게 파기시켰다.

 

 후권이가 술을 못 하는 편이었기 때문에 그 날의 조연은 맥주로 결정했다. 1차는 후권이가 대학 시절 아르바이트를 했던 치킨집에서의 치맥으로 시작했다. 가게 문을 열자마자 주방 이모와 사장님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후권이를 반겼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근황을 주고받는 후권이의 모습은 아르바이트를 하던 당시의 주방 이모와 사장님이 지금까지 가게를 지키고 계신다는 것을 직감케 했다. 오고 가는 훈훈한 덕담과 안부에서 나는 후권이가 걸어온 지난 20년의 길과 사회성, 또 인간성 등이 한데 결합된 '사람 이후권'의 모습을 보았다. 모처럼 나온 휴가에 입대 날이 같았던 동기와 함께 자라온 동네에서 한 잔 하러 왔다고 하니 사장님께서는 망고맥주를 서비스로 주셨다. 단순한 유랑 욕구로 찾은 시흥동에서 마주했던 그 때의 후권이의 모습은 만남을 함께하는 사람이 자라온 동네에서 가질 수 있는 술자리에 대한 가치도 결코 가볍지 않다는 것을 느끼게끔 했다. 2차는 치킨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던 작은 맥주바에서 이어갔다. 우리는 마셔보지 않았던 수입맥주에 테이스팅을 시도하며 맥주의 맛을 구분하기 시작했다. 그 때 오갔던 대화의 내용들도 결코 가볍지는 않았다. 어느덧 시간은 자정과 가까워져 있었다. 알코올이 가미된 이후였기 때문에 운전은 당연지사 대중교통의 도움을 받아 귀가할 수밖에 없어서, 그래서 더 긴 시간을 함께할 순 없었지만, 그 날의 가치는 결코 함께한 시간만으로 판가름을 하기에 너무나도 귀중했다.

 

 그 날 이후, 부대 안에서 마주칠 때 건네는 우리의 인사가 많이 변했다. 형식적이었던 인사보다는 악수를 하기 위해 오른손을 먼저 내밀게 되고 뜸하게 보이기라도 하면 살아 있었냐며 실없는 농담을 던진다. 군대 생활에서 쌓게 될 인간관계 역시 학창시절의 인간관계 못지 않게 너무나도 소중했다. 대학 시절, 수업이 자주 겹치던 친한 누나가 해 준 말이 있다. “사람을 따지지 않고 자연스럽게 친해질 수 있는 시기에 인연을 많이 맺는 건 행운과도 같아.” 라고. 그것이 가능한 곳은 곧 학교라고 말했다. 누나는 나에게 나중에 졸업을 하고 사회에 진출하면 이렇게 허물없이 사람을 사귈 수 있는 기회가 드물게 될 것이라며 대학 시절은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단언했다. 그러면서 학점 못지않게 대학에서의 인간관계도 충실하게 쌓으라고 충고했다. 그 말은 나에게 좋은 귀감이 되었다. 그러나 남자들에게 있어서는 그 마지막 기회를 군대로 수정해도 괜찮지 싶다. 남자들은 군대에서 아무 조건 없이 모든 것을 털어놓을 수 있다. 힘든 일이 있으면 서로 욕이라도 한 번 하면서 담배를 태우면 그만이고 행복한 일이 있으면 걸그룹 무대와 레알 마드리드 대 바르셀로나의 하이라이트 경기를 보면서 희열을 나누면 그만이기에. 나도 이렇게 조건없이 자연스레 맺어진 이후권과의 인연을 행운과도 같이 여겨 그 날의 잊지 못할 시원했던 맥주의 맛처럼 오래토록 간직할 것을. 그리고 다음에는 내가 살고 있는 상봉동에서 만나기로.


 

Instagram @choi0wan @lukewon

일꺾을 맞이한 그들의 끝겨울,

2017년 2월 시흥동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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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choi0w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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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맞이할 때

내얘기 2017. 3. 17. 21:47

 선임에게 들린 비보의 충격이 나에게는 마치 환각과 같았다.

 

친구의 죽음

 

 죽음이란 단어로부터 전해지는 어감은 형언하기 힘든 속박감으로 미친 듯이 나의 몸을 죄어오는 기분 탓에 잠시 떠나보냈던 의식을 다시 몸속에 데리고 와 나의 정신을 원래의 상태로 깨우게 했을 때 이미 나의 오른손은 빈 담뱃갑만을 쥐고 있었다. 선임은 나에게 허심탄회하게 친구와 함께 했던 10여 년 전의 유년시절 이야기를 들려주며 함께 웃고 함께 힘들어하던 그 시절을 회상했다. 8개월을 함께 부대끼고 지내면서 이 사람, 참 부럽다.” 라는 생각이 하루 내내 끊이질 않았다.

 

 선임의 시야 앞에는 마치 사막 한가운데에 있을 오아시스와 같은 야속한 신기루가 아른거리는 듯 했다. 어쩌면 그 신기루 속에는 찬란했던 과거의 나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내가 죽음을 맞이할 때, 혹은 친구가 죽음을 맞이했을 때 내가 본 그 날의 선임처럼 시간의 흐름조차 망각하지 못한 채 나와 함께 했던 지난 날들을 눈 앞에서 그리고 있을 사람이 있기는 할까. 또한 나도 그러한 친구가 있다고 느낄 수 있을까. 얕고 넓었던 인간관계는 이렇게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서 나를 덮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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