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8.08

D+7

국제미아


브루나이로 가는 페리가 출발하기까지는 아직 30분이나 남았다.

그러나 국경을 이동하는 페리의 선착장 치고는 너무나 고요했던 선착장의 분위기에 나는 당황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래도 창구 직원의 호통에는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되어 선착장의 끝까지 가 보았다.


제셀톤 포인트에서 4번 창구 직원에게 선착장 위치를 물었을 때 일어났던 일이 궁금하다면?

[말레이시아⑧] 아듀 코타키나발루! 브루나이로 향하는 페리 탑승기 을 정독해주세요.

(위 타이틀을 클릭하면 해당 게시글이 새 창으로 띄워집니다.)


가다 보니 어딘가 익숙한 모습이 보였다.

바로 출입국 심사대였다.



출입국 심사대에 들어가니 출입국 심사관이 나에게 여권을 보여달라고 했다.

나의 여권과 페리 탑승권을 확인한 출입국 심사관은 서둘러 페리에 탑승하라고 손짓을 했다.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선원들은 배를 출항시키기 위해 몹시나 바쁘게 움직였다.


나는 서둘러 캐리어를 끌고 페리를 타기 위해 게이트를 따라 내려갔다.

그러나 그 순간까지도 창구 직원과 출입국 심사관, 그리고 페리의 선원들이

왜 이렇게 하나같이 나를 닦달하고 보채는 걸까 하는 생각이 끊이지 않았다.


내가 페리에 탑승하자마자

한 선원은 나의 캐리어를 잽싸게 짐칸으로 던져넣고 페리의 문을 닫았다.


그리고 또다른 선원은 페리의 문이 닫히자 마자

부두에 묶어놓았던 밧줄을 푸르고 선장에게 출항 신호를 건넸다.


페리에 탄지 30초도 지나지 않아서 페리는 뱃고동 소리를 울리며 선착장을 떠났다.


그 시각은 오전 8시 3분이었다.


페리에 들어오니 페리 안에는 수많은 승객들이 앉아서 출항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무언가 잘못 되었음을 직감적으로 눈치챘다.


빠르게 움직이는 페리의 속도에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던 나는 던져지듯이 빈 자리로 앉혀졌다.



그리고 나는 휴대전화 사진첩으로 들어가

브루나이 행 페리의 출항 시간을 다시 확인했다.


사진을 다시 확인한 나는 경악했다.



코타키나발루(사진 속 K.K)에서 라부안으로 출발하는 페리의 출항 시간은

오전 8시 30분이 아니라 바로 오전 8시였던 것이다.


그 순간,

온 몸에 소름이 확 돋으며 등골이 오싹해졌다.


생각을 다시 해 보니 코타키나발루에서 출발하여 라부안에 도착하는 시간이 11시 30분이었고,

라부안에서 브루나이로 출발하는 시간이 오후 1시 30분,

그리고 브루나이에 도착하는 시간이 오후 2시 30분이었기 때문에

나는 모든 시간을 30분 단위로 잘못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만약 호스텔에서 5분, 아니 1분이라도 더 여유를 가졌다면

나는 브루나이로 가지 못할 뻔 했다.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한 상황.


이번 여행의 모든 순간들 중에서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철렁하는 순간은

단연 이 순간이었다.


오전 8시 30분.



어느덧 페리는 통화권을 이탈하였다.

서서히 고된 여정이 시작되고 있다는 것이 실감나기 시작했다.


오전 8시 45분,


강하게 쏟아내리는 폭우, 창문으로 무섭게 부딪치는 물살,

그리고 좌우로 심하게 요동치는 페리.

게다가 지나치게 빵빵한 에어컨 바람 때문에

시원하다 못해 니트티가 생각날 정도로 추웠던 페리 안.


 


가뜩이나 민소매를 입고 있었던 나로서는 이 순간, 버티기 힘들 정도로 고된 시간이었다.

캐리어에서 긴팔을 꺼내 오고 싶었으나 좌우로 심하게 요동치는 페리 안에서

캐리어를 찾으러 이동하는 것은 도저히 쉽지 않아 보였다.


그래서 나는 있는 힘껏 몸을 꽉 껴안은 채 이 악물고 에어컨의 추위에 맞섰다.


그러던 그 때,

페리 안에서 입에다 바구니를 대고

오바이트를 하는 첫 번째 승객이 등장했다.


고통스럽게 오바이트를 하는 적나라한 소리가 페리 안을 가득 채웠다.

그러나 그 어느 승객도 그 승객을 질타하거나 비난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순간,

페리 안에 있던 모든 승객들이 배멀미와 힘겹게 싸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멀미를 잘 하지 않는 나도 이 순간만큼은 정말 죽을만큼 힘들었다.

그런데도 끝까지 멀미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멀미를 한 후에 느끼게 될 입 안의 텁텁함을 절대 느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잠에 들려 노력했다.

목베개를 끼고 잠에 들 수 있는 자세를 찾기 위해 의자 위에서 몇 번이나 몸을 뒤집었다.

그런데 노력을 하면 할수록 잠은 오지 않고 속만 더 메스꺼워졌다.


이 순간,

여행이고 나발이고 그냥 다 때려치우고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단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오전 11시 40분.


어쩌다 보니 잠에 들어 있었다.

깨고 나니 예정된 도착 시간은 이미 넘어가 있었지만

통화권에 다시 들어왔고 페리는 터미널의 근처에 와 있었다.



창밖을 보니 하늘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을 보이고 있었고

페리 안에는 단 한 명도 예외없이 모두가 잠에 들어 있었다.


악천후의 기상과 배멀미와의 싸움에서 이기고

무사히 라부안에 도착한 내게 스스로 대견한 기분이 들었다.


오후 12시.


드디어 지옥같았던 페리에서 탈출했다.

나는 코타키나발루를 출발한지 4시간 만에 라부안 터미널에 도착했다.


 

 


이제 이 곳에서 1시간 가량의 시간을 보내다가

1시 30분에 브루나이로 향하는 페리를 한 번 더 타야 브루나이에 도착할 수 있다.


어디에서 시간을 때울까 고민하다가 나는 근처에 라부안 박물관이 있는 것을 보고

라부안 박물관에 다녀오기로 결정했다.


 


 라부안 박물관은 박물관이라고 하기엔 민망할 정도로 작은 규모였다.

입장료가 무료여서 그런가.

생각보다 볼 거리가 너무 없어서 그냥 동네 시장 구경하듯이 짧게 구경하다가 바로 나왔다.


터미널로 다시 오니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간단하게 한 끼를 때울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혹시라도 브루나이로 가는 중에 멀미를 하게 될까봐 제대로 식사를 하기가 두려웠다.


그런데 배고픔에 계속 맞서자니 너무 지치고 힘들어서 그냥 한 끼를 때우기로 했다.


폭우 속에서 흔들리는 페리 안에서도 멀미를 참았는데 내가 뭘 못 하겠어?’


그래, 어차피 브루나이로 가는 페리는 이동 시간이 1시간 밖에 되지 않으니

멀미를 참는 건 그리 어려울 것 같지 않았다.


 


나는 카야 크림맛 와플과 레인보우 펄이 들어간 페퍼민트 아이스 블렌디드를 먹었다.

와플은 내 입맛과 맞지 않았지만 아이스 블렌디드는 페퍼민트의 향이

멀미와의 싸움으로 인해 잃어버린 생기를 되찾아주는 기분이 들 정도로 향긋하고 시원했다.


오후 1시.


터미널 카운터에서 터미널 이용료를 지불한 후

나는 라부안에서 브루나이로 가는 페리에 탑승하기 위해

수하물 검사와 출국 심사를 진행했다.

(국경은 라부안에서 브루나이를 갈 때 넘기 때문에

코타키나발루에서 라부안으로 갈 때는 수하물 검사를 진행하지 않음.)



페리를 타고 국경을 넘는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선착장에서 수하물 검사를 하고 여권에 출국 허가 도장을 받는 것은 신선한 경험이었다.


 


배를 타고 나니 선원은 곧바로 출입국 카드를 나눠주었다.

출입국 카드의 작성을 마친 나는 바로 곯아 떨어졌다.


오후 2시 30분.


이번에는 멀미로 인한 불편함 하나 느끼지 않은 채 무사히 선착장에 도착했다.

새로운 나라에 도착했다는 설렘이 터미널 밖으로 향하는 나의 발걸음을 가볍게 만들어주었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브루나이에서의 여정이 시작된다.


 


브루나이 입국 심사와 수하물 검사를 마친 나는 터미널 밖으로 나와

때마침 대기 중에 있던 33번 버스를 탔다.

33번 버스는 5분 정도 달리다가 모든 승객들을

브루나이 시내의 중심지인 반다르세리베가완까지 갈 수 있는 버스 정류장에 내려준다.


 


브루나이의 첫 이미지는 차분했다.

내가 브루나이에 대해 미리 갖고 있던 이미지가

왕국, 부자, 자연과 같은 카테고리들 때문이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냥 평범하게 화창하던 브루나이의 풍경도

괜히 어릴 때 만화 속에서나 보던 왕국의 한적함처럼 느껴지곤 했다.


버스에 있던 안내원은 승객들에게 시내로 가는 37번 버스로 환승하라고 말했다.

그러나 나는 시내로 가지 않고 공항으로 가서 브루나이 유심 카드 구입과 환전을 할 예정이었다.

37번 버스가 공항도 들르냐고 물었더니 안내원이 공항으로 갈 승객은 38번 버스를 타라고 했다.


 


33번 버스에서 내린 나는 38번 버스가 오기까지 기다렸다.

한 15분 정도를 기다리고 나니 정류장에 38번 버스가 도착했다.

기사님은 33번 버스에서 받은 나의 표를 확인하더니 바로 출발하셨다.


그 때, 쭈뼛대는 나의 모습이 불안하기라도 했는지

한 승객이 내게 어디까지 가냐고 물었다.


Where are you going?

(버스 안 승객)

 

I’m going to Brunei international airport.

(영완)


그러자 그 승객은 기사님께 Hey!” 라고 말을 걸더니 캐리어를 들고 있는 나를 가리키며

브루나이 공항에 가는 승객이라며 대신 말을 해 주셨다.


버스는 50분을 달려 브루나이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나는 공항 근처가 어딘지, 또 정류장의 위치가 어딘지도 몰라

하차벨을 미처 누르지 못했는데도

기사님께서는 공항에 도착하자 알아서 버스를 세워 내가 내릴 수 있게끔 해 주셨다.



여행을 하다 보면 사소한 것에 감사함을 느끼게 되는 순간이 정말 많아진다.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 볼 때,

나는 과연 서울 버스 안에서 주저하는 외국인이

목적지까지 안심하고 도착할 수 있게 도와줄 수 있는 용기를 발휘할 수 있을까.


마음에 여유가 없는 일부 사람들은 그런 시선을 오지랖이라고 해석하곤 한다.

그러나 나는 그런 사람들의 용기있게 내민 손이 오지랖이라는 단어로 치부되어 버리는 게 너무 싫다.



두 번의 페리와 두 번의 버스를 타고서야

나는 브루나이 국제공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 순간까지도 나는 휴대전화를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에

백팩에서 노트북을 꺼내 <배틀트립> 방송 영상을 보며

유심 카드를 판매하는 샵을 찾아다녔다.


 


그런데 <배틀트립> 브루나이 편이 방송된 지도 벌써 2년이 지났다.

유심 샵에서 <배틀트립> 방송을 보여주면서 10달러 짜리의 같은 유심 카드를 달라고 하자

해당 유심은 더이상 판매되지 않는 제품이라고 하셨다.


이제 오로지 25달러 짜리 유심 카드만 판매하고 있으며

해당 카드로는 1주일간 브루나이 로컬 전화와 문자, 데이터를 무제한으로 사용할 수 있다.


브루나이 USIM [1주] 25브루나이달러(약 20,000원) / 2019.08 기준

싱가포르 달러와 1:1 통용되어 싱가포르 달러로도 구입 가능(거스름돈은 브루나이 달러)



유심 카드를 구입하면서 이제 브루나이에서의 휴대전화 사용이 자유로워졌다.

이제 울루 템부롱 정글투어의 예약을 한 후,

한국에서 미리 예약한 호텔로 가서 체크인을 하면 된다.


말레이시아에 그랩이 있다면 브루나이에는 다트가 있다.

나는 다트라는 어플을 이용하여 울루 템부롱 정글투어를 예약할 수 있는

더 브루나이 호텔로 가기로 했다.

그런데 공항 주변에서는 다트가 잘 잡히지 않는다는 유심 샵 직원의 말에

수강신청 때문에 시간을 지체하고 싶지 않았던 나는 택시를 타고 더 브루나이 호텔로 이동하기로 했다.


그런데 택시비가 너무 비쌌다.

공항에서 더 브루나이 호텔까지 무려 25달러라는 것이다.

다트를 이용하면 7달러 내외로 갈 수 있는 곳을 무려 3배 넘는 가격을 지불하면서 가야 하는 상황.


그러나 일부러 다트를 사용하기 위해 공항 주변까지 걸어서 이동하며

애매한 시간 낭비를 하고 싶지 않았던 나는

눈 딱 감고 택시를 이용하여 더 브루나이 호텔까지 가기로 했다.

이것은 내가 브루나이에서 타는 처음이자 마지막 택시였다.



더 브루나이 호텔에 도착한 나는 프론트에서 울루 템부롱 정글 투어를 예약했다.

더 브루나이 호텔에서는 투숙객이 아니어도 울루 템부롱 정글 투어의 예약이 가능하다.


프론트 직원이 정글 투어 예약 날짜를 묻자

나는 그 자리에서 브루나이의 일기예보를 확인한 후

8월 10일 토요일로 예약을 하겠다고 했다.


울루 템부롱 정글 투어는 브루나이에 오는 모든 관광객들의 목적이 되는 일정과도 같다.

그래서 한국에서 어떠한 사전 예약도 하지 않은 내가

너무 대책없는 도박을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있었지만

당장 이틀 뒤의 투어 예약이 가능한 것을 보고

생각만큼 예약 경쟁률이 심하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울루 템부롱 국립공원 정글투어(호텔 픽업, 식사(조식, 중식) 포함) [1인] 150브루나이달러(약 130,000원)

더 브루나이 호텔 현지예약 (2019.08 기준)

싱가포르 달러와 1:1 통용되어 싱가포르 달러로도 구입 가능(거스름돈은 브루나이 달러)


유심 카드도 샀고 울루 템부롱 정글 투어의 예약도 큰 탈 없이 마무리되자

어깨 위에 올려져 있던 무거운 짐 하나가 떨어져 내려간 기분이었다.


한시름 마음의 짐을 덜은 나는 편안하게 다트를 불러

브루나이에서 나의 집이 되어 줄 하이어 호텔로 향했다.


 

 


하이어 호텔(조식 불포함) [5박/1인] 106,255원 / 아고다 기준(2019.07 예약)


페리, 버스, 택시까지.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종일 교통 수단에 몸을 맡긴 하루였다.

이제 좀 두 발 뻗고 침대에 누워 휴식을 좀 취해 볼까 했는데

수강신청 과목을 장바구니에 담아야 한다.


잽싸게 노트북 전원을 켜서 2학기에 수강하고자 하는 과목들을 장바구니에 담았다.

다행히 내가 듣고자 하는 과목들은 많은 사람들이 몰리지 않았다.


이제 수강신청이라는 짐까지 덜었으니 식사를 해야 되겠다.

나는 호텔 라운지에 있던 식당에서 블랙 페퍼 비프 철판덮밥과 파인애플 주스를 먹었다.


 


여행 내내 통통한 쌀로 지어진 밥이 먹고 싶었다.

코타키나발루에서도 종종 밥은 먹었지만 먹었던 모든 밥이 모두 한국의 밥과는 달랐다.

한국의 쌀만큼 통통하지도 않았고 영양가가 없는 것처럼 쌀알이 금방 바스러지곤 했다.

처음에는 그 모든 것을 현지식 음식이라 생각하며 먹었지만

먹으면 먹을수록 점점 한식이 그리워지고 김치가 생각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브루나이에 와서 첫 끼가 되어 주었던 이 덮밥이

내가 먹고 싶었던 밥맛과 가장 가까웠다.


나는 양손에 숟가락과 포크를 쥐고 정신없이 덮밥을 먹었다.

식사를 마친 후에는 식당의 바로 옆에 있던 편의점에서

간단한 간식거리를 산 후 방으로 올라가기로 했다.


한 두개의 과자봉지를 집어들고 계산대로 향하는 순간,

나는 미친 대박.” 이란 소리를 나도 모르게 큰 소리로 내뱉고 말았다.



바로 한국 라면이 보인 것이다.


그 순간, 나는 손에 쥐고 있던 과자들을 다시 원래 자리에 갖다놓은 후

뭐에 홀리기도 한 사람처럼 신라면과 콜라를 사서 카운터로 향했다.

이 와중에 콜라도 태극기와 비슷한 로고가 새겨진 펩시 콜라를 샀다.

(나는 한국에 있을 때 콜라는 코카콜라밖에 먹지 않았다.)


계산을 마치고 나는 편의점 안에 있던 테이블에서 바로 컵라면을 끓여 먹었다.



사실 나는 지금까지 해외여행을 떠날 때,

김치와 김을 챙겨서 여행하는 한국인들을 절대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그런 사람들을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았으며 비난하기까지 했다.


아니, 외국 나가서 김치 먹고 김 먹을 거면 대체 뭐하러 외국 나가는 거야? 그냥 한국에 있지.’


이번 여행을 떠나기 전에도 나의 엄마는 내게 밥은 먹고 가냐면서

김치와 밥 얘기가 담긴 카카오톡을 보냈다.

그 말에 답답한 기분이 들었던 나는 화가 나서 퉁명스런 말투로 엄마에게 답장을 보냈다.



그런데 엄마 말은 다 맞다고 했다.


집 떠난 지 일주일만에 나는 한식이 그리워 미칠 것만 같았다.

심지어 엄마가 먼저 말을 꺼내지도 않은 컵라면은

내가 알아서 먹지도 않겠다고 해 놓고서

브루나이에 오자마자 바로 하나를 사서 국물까지 뚝딱 해치웠다.


덮밥에 컵라면까지 먹고 나니 세상천지 이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방으로 올라오니 어느새 브루나이에도 밤이 찾아왔다.

복도 끝 너머로 보이는 황홀하게 빛나는 자메 아스르 하사날 볼키아 모스크가 눈에 띄었다.


브루나이에 왔다는 것이 서서히 실감나기 시작했다.



상상조차 해 본 적 없던 왕국.

왕국이라는 단어에서 전해지는 묘한 아우라와 기류를 서서히 알아가기 시작했다.


그래서 내일 아침에 해가 뜨면

나는 자메 아스르 하사날 볼키아 모스크에 가기로 했다.


그렇게 브루나이에서의 첫 번째 날이 저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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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08

D+7

국제미아


2019년 8월 8일 목요일,

오전 6시.


드디어,

브루나이로 가는 날의 아침이 밝았다.


나는 7시에 호스텔에서 나와 선착장이 되는 제셀톤 포인트까지

그랩 차량을 부르지 않고 걸어서 이동할 것이다.


왜냐하면 코타키나발루에 있는 기간은 총 8일이었지만

내가 구입한 유심 카드는 7일간 이용이 가능한 유심 카드였기 때문에

8일째가 되는 오늘부터는 더이상 스마트폰을 사용할 수 없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다 나의 계획이었다.

어차피 8일째 되는 날의 아침 일찍 나는 브루나이로 떠날 예정이었기 때문에

7일 유심 카드를 구입해도 크게 일정에 차질이 생기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 곳에서의 마지막 조식을 먹고 호스텔을 나서려고 하니 시간은 7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호스텔에서 제셀톤 포인트까지는 걸어서 가도 여유있게 30분 정도 걸리는 데다가

페리는 8시 30분에 출항을 하니 서두를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호스텔에서의 마지막 아침을

조금이라도 더 느긋하게, 한편으로는 더 느리게 시간을 만끽하면서

한국에서 직장생활을 할 때는 미처 느끼지 못했던 여유로움을 가지며 움직여 보기로 했다.



오전 7시 20분.


나는 제셀톤 포인트로 출발하기로 했다.

8시 즈음에 제셀톤 포인트에 도착하면

천천히 선착장의 모습을 눈에 담으며

간단한 주전부리를 사 들고 페리에 탑승하기로 했다.



안녕~ 코타키나발루!”


나에게 있어서 6박 7일은 너무나 짧은 기간이었지만

이 시기에 라비@사바 호스텔에 있던 투숙객 중에서는

내가 가장 오랫동안 투숙을 하고 있던 사람인지라

호스텔 매니저 부부와 이 곳에서 함께한 각 나라 여행객들,

그리고 깔끔하고 아늑했던 이 곳의 모든 시설까지도 그새 많은 정이 들어버렸다.


호스텔을 나서니 하늘에선 가늘게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 때문에 나의 몸은 샤워를 한지 채 한 시간이 지나지 않았는데도

비와 땀으로 범벅이 되고 말았다.


오전 7시 58분.


나는 배 안에서 먹을 주전부리를 사기에 앞서

브루나이 행 페리 티켓을 구매했던 4번 창구로 가서

내가 탈 페리의 선착장 위치를 먼저 파악하기로 했다.


코타키나발루에서 브루나이로 가는 페리 티켓 구입 방법이 궁금하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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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타이틀을 클릭하면 해당 게시글이 새 창으로 띄워집니다.)


나는 나의 티켓을 발권해 주었던 직원에게 내 티켓을 보여주면서

이제 곧 브루나이로 가는 페리에 탑승할 예정인데

어디에서 페리를 기다리면 되냐고 묻자

직원은 내게 “Now! Go!” 라고 소리쳤다.


직원의 호통에 나는 당황했다.


아직 시간 30분이나 남아있는데 왜 이렇게 보채?’


일단 직원의 말에 따라 서둘러 캐리어를 끌고 선착장 쪽으로 이동했다.


그런데, 선착장이 어딘가 허전했다.



국경을 이동하는 페리의 출발을 30분 앞두고 있는 선착장으로 보기엔 너무나 허전했다.

심지어 캐리어를 끌고 있는 사람은 나 혼자밖에 없었다.


적적한 선착장의 풍경에 당황하고 말았다.


오전 8시.


어떻게 된 거지...?’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참고로 이 상황에서의 나는


유심 카드 기간 만료,

호스텔 체크아웃 완료,

지폐 링깃 전액이 소진(동전만 소액 남아 있었음)된 상태였다.


그리고 심지어 브루나이에 도착하면

2학기 수강신청도 해야 하는 상황.


책에서만 보던,

블로그에서만 보던,


소위 말하는 국제미아가 되 버린 걸까.




……




망했다.

진짜 망했다.


속된 말로 x 됐다.


아니 그런데,

출발하기까지는 아직 30분이 남아 있는데...


대체 무슨 일인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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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07

D+6

결판의 날


코타키나발루에서 온전하게 하루를 보낼 수 있는 마지막 날이 밝았다.

내일이 되면 나는 페리를 타고 브루나이로 넘어간다.


이 얘기인즉슨, 다른 말로 바꾸어 말하면

쁠라우띠가 섬 투어 일정을 더이상은 미룰 수 없는,

이 날의 날씨에 나의 스노쿨링과 머드체험 등의

해양 스포츠 일정 여부가 판가름이 나는 결판의 날이 밝은 것이다.


전날 밤, 잠에 들기 직전까지도 비가 오지 않기를 바라며 잠에 들었는데

과연, 나는 무사히 쁠라우띠가 섬에 들어갈 수 있을까.


알람 시간에 맞춰 떠진 눈.

나는 재빠르게 이불 밖으로 나와 창밖을 바라보았다.


 


야속할 정도로 하늘에는 희뿌연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고 이내 강한 빗줄기를 매정하게 뿌리기 시작했다. 


하.. 씨x..


그래도 동남아시아는 스콜성 비가 자주 내리는 편이니 금세 비가 그쳐 다시 해를 띄우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나 혼자만의 애처로운 희망고문에 불과할 뿐이었다.



비가 너무 많이 내려서 내 생각에는 투어가 취소될 것 같아. 픽업 장소로 나가지 않아도 되지?


(8분동안 아무런 답장이 없자)


우선 나는 호스텔의 픽업 장소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영완)

 

좋은 아침 친구.

아... 오늘 쁠라우띠가 섬 투어는 헤비급 비 때문에 다시 취소되었어.

(도라)

 

이럴 수가... 쁠라우띠가...

(영완)



끝내 나는 코타키나발루에서의 해양 스포츠는 경험하지 못한 채 브루나이로 넘어가게 되었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호스텔로 들어와 토스트를 먹으며 오늘의 일정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 때, 엊그제 탄중아루 비치에서 만나 필리피노 야시장에서의 먹방을 함께한 대니형 일행이 떠올랐다.

만약 형들의 일정에 정해진 계획이 없다면 대니형 일행과 하루를 보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일정을 조율하기 위해 대니형에게 카카오톡을 보냈는데

형들도 오늘 해양 스포츠를 하기 위해 가야섬에 들어가는 일정이셨다고 했다.


현지에서 해양 스포츠를 예약한 나와 달리

형들은 한국에서 미리 여행사를 통해 예약을 하고 온지라

취소를 확정받기까지의 시간이 조금 더 걸렸다.


만약 해당 여행사로부터 취소를 확정받으면 형들은 나와 함께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형들은 계속해서 지체되는 취소 확정에 지치기라도 했는지

일단 아침을 먹으며 취소 확정을 기다리겠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형들은 내게 아침 식사를 함께 하자며 나를 로컬 식당으로 부르셨다.


 


그렇게 이틀 만에 나는 대니형 일행을 이마고 쇼핑몰 주변 로컬 푸드 식당에서 다시 만났다.

형들은 여행사의 늦어지는 대처에 답답해하시며

빠른 취소 확정과 현지에서 환불에 대한 확신을 받은 나를 부러워했다.


그러면서 일행 중의 한 명이던 대이빗 형이

만약에 가야섬 투어가 취소되면 악어나 보러 가실래요? 코타키나발루에 악어 농장 있다고 하던데...라며

악어 농장에 대한 존재를 알려 주셨다.


그런데 아직 형들은 가야섬 일정에 대해서 취소를 확정받은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악어 농장 일정에 섣불리 OK를 하지 않았고

호스텔에서 블로그 작업을 하다가 따로 새로운 일정을 계획하겠다고 했다.



그렇게 우리는 아침 식사를 마치고 각자의 호스텔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런데 그 때, 형들이 드디어 여행사로부터 가야섬 일정에 대한 통보를 받았다.

가야섬 일정은 예정대로 진행된다고 한다.


그런데 대니형이 내게 자신을 대신해서 가야섬에 갈 의향이 있냐고 물었다.

대니형은 막상 가도 자신이 생각하던 바닷속의 풍경을 보지 못할 것 같다며

가야섬 일정을 자진해서 포기하셨다.


순간 엄청난 고민에 휩싸였다.


그런데 내가 쁠라우띠가 섬에 가기로 했던 이유가

가야섬이나 사피섬에 비해 보다 적게 찾는 관광객의 수와

그로 인해 더 깨끗하게 보존된 섬의 깨끗한 모습이었기 때문에

쁠라우띠가 섬을 대신하는 일정으로 가야섬에 가고 싶지는 않았다.


그 외에 답변을 전해야 하는 시간적인 상황도 촉박했던지라

나는 대니형에게 가야섬에 가지 않겠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그렇게 대니형은 마사지 샵으로, 나는 호스텔로,

제임스 형과 대이빗 형은 가야섬으로 향했다.


대니형과 둘이서 새로운 일정을 계획해 볼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대니형과 카카오톡을 나눌수록 대니형은 느긋하게 쉬면서 시간을 보내는 걸

더 선호하시는 편이신 것 같아 혼자서 일정을 계획하기로 했다.


 


호스텔로 돌아온 나는 노트북을 켜고 코타키나발루에서의 당일치기 일정을 세우기 시작했다.

그런데 마땅한 장소가 눈에 띄지 않았다.


탄중아루 비치, 필리피노 마켓, 워터프론트몰, 이마고 쇼핑몰, 야외 수영장,

블루 모스크, 핑크 모스크, 반딧불 투어, 스쿠터 질주, 브리즈 비치 클럽, 선데이 마켓...


코타키나발루에서 해양 스포츠를 빼고 할 수 있는 액티비티는 다 한 상황이었다.


그 때, 대이빗 형의 악어 농장 언급이 뇌리를 스쳤다.


검색을 해 보니 악어 농장은 차로 약 40분 정도 걸리는 다소 먼 위치에 있지만

어차피 시간은 오늘도 제약될 것이 없었고,

한국에서 보기 힘든 악어라는 동물을 보면서

매일 오전 11시와 오후 3시에 열리는 악어쇼에 참석하는 것이

지금의 상황에서 세울 수 있는 최고의 일정일 것 같았다.


악어쇼가 시작되기까지는 약 2시간 30분 정도를 남겨두고 있는 상황.

나는 제셀톤 포인트로 가서 쁠라우띠가 섬 투어의 비용을 환불받은 후

그랩을 이용하여 투아란 악어 농장으로 향했다.



[환불] 쁠라우띠가 섬 투어(스노쿨링, 장비, 호텔 픽업, 식사 포함) 240링깃(약 70,000원)


쁠라우띠가 섬 투어를 현지에서 저렴하게 예약하는 방법이 궁금하다면?

[말레이시아②] 쁠라우띠가 섬 투어와 브리즈 비치 클럽 바비큐 현지에서 예약하기 편을 정독해주세요.

(위 타이틀을 클릭하면 해당 게시글이 새 창으로 띄워집니다.)


그랩을 타고 투아란 악어 농장으로 향하는 도중,

기사님께서 미처 내가 생각하지 못한 부분을 짚어주셨다.

그것은 바로 투아란 악어 농장에서 제셀톤 포인트로 돌아올 교통편이었다.


투아란은 제셀톤 포인트와 달라. 여기처럼 그랩이 쉽게 잡히지 않을 거야.

(그랩 차량 기사님)

 

왜?

(영완)

 

시내로부터 너무 떨어진 곳이라서 그랩 차량이 거의 없어.

돌아올 교통편에 대한 준비는 되어 있어?

(그랩 차량 기사님)


아니..

(영완)


그러면 내가 투아란 악어 농장에서 돌아갈 때도 널 데려다 줄게.

(그랩 차량 기사님)


정말??

(영완)


물론이지.

(그랩 차량 기사님)


정말 고마워. 난 감동받았어.

악어쇼는 3시부터 시작되니 빠르면 4시, 아무리 늦어도 5시를 넘기지 않을게.

(영완)


알겠어.

(그랩 차량 기사님)


친절하신 그랩 차량의 기사님 덕분에 나는 악어 농장으로 가는 길에

돌아오는 교통편까지 안전하게 확보할 수 있었다.


40분 동안 열심히 달린 우리의 차량은 어느덧 투아란 악어 농장에 도착했다.


 


투아란 악어 농장 [1인(성인)] 30링깃(약 8,700원) + 세금 1.8링깃(약 520원)

→ 31.8링깃(약 9,200원) / 2019.08 기준


나른한 시간 오후 2시,

농장에 있던 모든 악어들은 부동자세를 취하거나

유유자적하게 물 위를 헤엄치며 조용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예상하지 못한 농장의 한적함에 다소 당황했지만

그러면서도 악어가 가끔씩 예고없이 몸을 움직이곤 했다.

크게 움직인 것도 아닌데 악어가 움직일 때마다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농장 곳곳에 있던 팻말들을 읽어보니 악어들의 평균 나이대가 60~70세였다.

악어들의 유유자적함을 바로 수긍하게 되었다.


악어님들. 편히 계세요. 얌전히 보다 갈게요..


 


그렇게 악어 농장을 둘러보는 도중, 갑자기 익숙한 노랫소리가 들렸다.



바로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악어 농장의 배경음악으로 나오는 것이었다.

(신나는 비트에 비해 너무나 움직임이 없던 악어들의 반응이 다소 민망했다.)


말레이시아에 온 이후 K-POP이 들렸던 적은 사실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이마고 쇼핑몰에서는 NCT127, 트러블메이커, 티아라의 노래가 흘러나왔고

코타키나발루에서의 불금을 즐기기 위해 가야 스트리트 야시장으로 가는 도중,

루카스 일행과 함께 탔던 그랩 차량의 기사님의 휴대전화에는 아이콘의 노래가 세 곡이나 있었다.


NCT127_無限的我(무한적아)

코타키나발루 이마고 쇼핑몰 / 2019.08.05


Trouble Maker(현승, 현아)_Trouble Maker(트러블메이커)

코타키나발루 이마고 쇼핑몰 / 2019.08.05


T-ARA(티아라)_SEXY LOVE

코타키나발루 이마고 쇼핑몰 / 2019.08.07


한국에서 보도하는 K-POP의 해외인기에 대해서 솔직히 과장하는 건 아닐까 싶었는데

이번 여행을 계기로 K-POP의 진실된 해외 인기와 내 나라 한국의 위상을 실감할 수 있었다.


악어 농장을 다 둘러보고 나니 어느새 시간은 악어쇼가 시작될 시간과 가까워져 있었다.

서둘러 공연장에 갔더니 나를 악어 농장까지 태워다 준 그랩 기사님이 악어쇼의 시작을 기다리고 있었다.


 

 


기사님께서도 악어 농장 주변에 있으면 어차피 손님을 태우지 못할 테니

나를 기다리면서 악어 농장을 구경하려고 하시는 것 같았다.

반가운 마음에 한걸음에 달려가 기사님께 인사를 건넸다.

기사님의 배려심에 고마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죄송한 마음이 같이 들었다.


 

 


 악어쇼를 보면서 여러 감정이 복합적으로 들었다.

보기만 해도 위협적이고 무서운 악어가 있는 물 속에

맨발로 들어가 맨손으로 악어를 유인하는 사육사의 조련에 감탄하면서도


악어를 하나의 생명체로 생각했을 때는

인위적으로 악어를 작대기로 자극하며 물밖으로 유인하는

조련 방법이 꽤나 가학적이라는 생각이 함께 들었다.


또, 행여나 돌발적인 상황이 일어나

사육사가 악어에게 물리기라도 하면 어떡하나 싶은 걱정과

인간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정해진 시간마다 억지로 작대기를 맞으며

물밖으로 나와야하는 악어에 대한 걱정이 같이 들었다.


악어쇼가 끝나자 모든 관객들이 박수와 환호로 악어쇼에 화답했다.

나도 박수를 보내긴 했지만 마냥 밝은 얼굴로 악어쇼에 화답할 수는 없었다.


 


악어쇼를 다 보고 악어 농장을 나오면서 나는 일부러 나를 위해

악어 농장에서 시간을 할애해주신 기사님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자 시원한 콜라 한 캔을 사 드렸다.


 


그렇게 쁠라우띠가 섬을 대신해서 악어 농장에서 오늘의 새로운 일정을 소화한 나는

KFC에 들러 간단하게 간식을 먹었다.

메뉴 이름이 기억나진 않지만 치킨에 수프 쏟은 맛이 났다.


맛이 없었다는 얘기다.



간식을 먹으며 길을 걷다보니 어느새 호스텔에 도착했다.

호스텔에 도착하고 나서는 짐 정리를 하면서 내일 아침 브루나이로 떠날 준비를 했다.


 


나는 호스텔 매니저에게 내일 아침 일찍 호스텔을 떠나야 하는

내 상황을 설명하며 얼리 체크아웃을 요청했다.


그렇게 내일을 위한 준비가 얼추 마무리가 되고 나니

나는 호스텔 테라스의 쿠션의자에 누워 코타키나발루에서의 마지막 야경을 눈에 담기로 했다.


그 때, 갑자기 대니형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이마고 쇼핑몰의 아래에 매일 저녁마다 라이브 공연이 열리는 바가 있는데

그 곳에서 공연을 보며 같이 맥주를 마시자는 전화였다.

너무나 고마운 제안에 나는 렌즈를 끼지 않은 상태였는데도(나는 렌즈를 빼고 나면 웬만해서 외출을 하지 않는 편이다.)

바로 대니형이 알려준 징 레스토랑 바로 내려갔다.


 


아침 식사를 함께한 이후 다시 만난 형들에게 나는 오늘 하루 일정에 대한 얘기를 물어보았다.

대니형은 마사지 샵에 가서 편하게 마사지를 받은 후 숙소에서 여유있게 쉬면서 시간을 보냈고,

대이빗 형과 제임스 형은 동물원에 다녀왔다고 했다.


대이빗 형과 제임스 형에게 가야섬에 대한 일정이 정상적으로 진행된다고 해서

가야섬에 간 게 아니냐고 물어보니까

가야섬에 가는 배에 타려고 하는 순간, 아주 잠깐동안 내린 비 때문에

그 자리에서 바로 가야섬 일정에 대한 취소를 통보받았다고 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까 형들이랑 악어 농장 같이 다녀올 걸..


형들 일행 중에서 이 날, 결국 최고의 승자는 대니형이었다.


무르익는 분위기 속에 점점 시간이 흘렀고

그러다보니 어느새 바는 라이브 공연을 시작할 시간이 되어 있었다.



라이브 공연이 시작되었다.

전주가 흘러 나오는데 나와 형들은 모두 놀란 표정을 지은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



라이브 가수들이 인디가수 숀의 ‘Way Back Home’을 영어로 개사해서 부르는 것이었다.

코타키나발루에서의 마지막 밤을 코타키나발루에서 친해진 한국인 형들과 한국 노래에 맥주를 마시며 보내게 되었다.


정말,


정말이지 행복했다.


이런 순간은 몇 달 전부터의 계획으로도 실천할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이 날, 나는 형들에게 나의 명함을 건네주었다.


 


여행을 계기로 금연을 실천하고 있었는데

술이 몇 잔 들어가고 대니형이 밖에 나가 연기를 뿜고 있으니 견디기가 힘들었다.


탄중아루 비치에서 나에게 먼저 말을 걸어 주었고,

필리피노 야시장에서도 나에게 줄 망고를 제일 먼저 구매해 준 유독 고마운 대니형과

맥주를 마시러 바에 내려갈 때, 나를 부르자는 얘기를 먼저 꺼냈다는 대이빗 형과 제임스 형.


코타키나발루에서 나와 함께한 모두가 뜻깊고 소중한 인연이지만

대니형 일행은 유독 더 기억이 짙게 남는 인연이다.

같은 한국인이었다는 동질감도 이유가 되지만

함께한 즐거운 시간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았기 때문인 것 같다.


한국에 돌아갔을 때,

자주 만나자는 그런 지키지도 못할 빈말은 서로가 하지도 않았지만

언젠가는 꼭, 한국에서 다시 만나 우리는 이 날처럼 다시 한 번 잔을 부딪치기로 약속했다.



그리고 반딧불 투어에서 나의 말벗이 되어 주고,

나의 쁠라우띠가 섬 투어 일정을 위해 투어 스케줄을 강행하고 있는 도중에도

나의 카카오톡 문의에 불철주야 답장을 해 주었던 도라.


도라는 내가 브루나이로 떠나기 전, 같이 술을 한 잔 하자고 했었는데

우리는 그 약속을 오늘 실현하기로 했다.


대니형 일행과 헤어진 나는 도라의 퇴근 시간에 맞춰 필리피노 마켓으로 향했다.

도라는 나를 위해 코타키나발루의 현지 안주인 꼴뚜기 꼬치 구이와 생선 구이를 사 주었다.


 


예정보다 꽤 늦어진 도라의 퇴근과

내일 아침 일찍 브루나이로 가는 페리에 탑승해야 하는 나의 상황을 고려하여

결국 술은 마시지 않기로 했지만 도라와 나는 즐거운 분위기 속에서 대화를 하며

코타키나발루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냈다.


도라는 나를 제셀톤 포인트에서 처음 봤잖아. 그 때, 첫인상이 어땠어?

(영완)

 

 코타키나발루는 거의 가족끼리 오거나 연인들이 오는 경우가 많아서 좀 놀랐어.

(도라)


아, 혼자라서?

(영완)

 

 응. 왜 혼자 왔지? 싶었어.

(도라)


반딧불 투어에서 다시 만났을 때,

너가이드님께 나를 한국어로 ‘제셀톤 친구’라고 소개해 주었을 때 무척 고마웠어.

(영완)


“(웃음) 그 때 떠오르는 단어가 그냥 제셀톤 친구였어.

(도라)


 


이 날, 나는 한국의 술인 소주를 궁금해 하는 도라에게

입으로 소주병 따는 소리 내는 개인기를 가르쳐 주면서

앞으로 한국인 관광객들을 만나면 이 개인기를 선보여 보라고 했다.


도라는 입으로 내는 똑딱 소리가 꽤나 재미있게 들렸는지

계속 빵 터지면서 다음에 만나게 될 한국인 관광객에게 이 개인기를 선보이겠다고 약속했다.


혹시라도 가이드님께서 이런 거 어디서 배웠냐고 물어보면 제셀톤 친구한테 배웠다고 하라 했다.



이제 나는 코타키나발루에서의 모든 일정을 끝마쳤다.


도라와 헤어지고 혼자 호스텔로 돌아오는데

계속 마음 한 편에서 아쉬운 기분이 일렁였다.

아직 누빌 나라가 두 곳이나 남았는데 왜 이렇게 아쉬운 걸까.



이유가 없다.

그냥 끝은 언제나 아쉽다.


 


침대에 누워 생각에 잠기다 보니

내일 아침, 잠에서 깨면 새로운 나라로 이동한다는 설렘과

코타키나발루에서의 끝을 맺고 싶지 않았던 아쉬운 기분이 함께 들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나는 잠에 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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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바꿋 반딧불 투어를 마치고 호스텔로 돌아가는 길,

도라에게서 카카오톡이 왔다.



“안녕, 친구. 브루나이에 언제 가는지 물어볼 수 있을까?

왜냐하면 당분간 우리 여행사의 쁠라우띠가 섬 투어 예약이 다 차 있어.”

(도라)


“8월 8일 아침에 브루나이로 가. 쁠라우띠가에 내일 갈 수 있을까?

(영완)


“가능하면 8월 7일로 미룰 수 있을까? 왜냐하면 내일(5일)과 6일은 이미 예약이 다 차 있어.

마지막에 알리게 되서 미안해.”

(도라)


“알겠어. 만약 7일에도 비가 오면 환불받을 수 있지?

나는 7일이 마지막 기회(코타키나발루에서의 마지막 날)라 걱정된다.”

(영완)


“알겠어. 8월 7일에 비가 오면 쁠라우띠가의 비용은 환불해줄게. 괜찮아?

(도라)


“좋아.

(영완)


“쁠라우띠가 일정이 끝나면 몇 시야? 아마 오후 4시?

(영완)


“운전 기사가 오전 7시 20분부터 40분 즈음에 너를 픽업하고 제티로 갈 거야.

투어가 끝나고 호텔로 돌아오면 아마 오후 6시 즈음이 될 거야.

(도라)


“알겠어. 고마워, 8월 7일로!

(영완)


“천만에. 만나서 반가워. 8월 7일의 투어에 내가 함께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

(도라)


“나도 그러길 바라.

(영완)


내가 코타키나발루에서 보낼 날들에 여유가 있었던 지라, 도라는 다시 한 번 쁠라우띠가 섬 투어 날짜를 조율해 주었다.

그 날은 내가 코타키나발루에서 보낼 마지막 날로 결정되었다.


2019.08.05

D+4

라이브 일정의 재미


8월 7일, 쁠라우띠가 섬에 가는 일정을 제외하면 이제 정해진 일정은 아무 것도 없다.

오늘은 어디에 가서 무얼 하면 좋을까.

늘 그랬듯이 일단 조식부터 천천히 먹으며 생각해 보아야 겠다.



조식을 먹으며 나는 이 호스텔이 이마고 쇼핑몰에 있다는 것을 다시금 알아챘다.

이마고 쇼핑몰은 코타키나발루를 대표하는 규모있는 쇼핑몰이다.

오늘은 이 곳을 둘러보며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배스킨라빈스.

때마침 주문하던 시간도 해피아워여서 1+1 적용을 받아 싱글 레귤러 사이즈를 하나 더 먹을 수 있었다.


말레이시아 배스킨라빈스 해피아워 [매주 월~금 12PM~3PM] (코타키나발루 이마고 쇼핑몰 기준)

싱글 레귤러 주문 시 싱글 레귤러 한 가지 맛 추가 가능



코튼 캔디 맛과 골드 메달 리본 맛.

골드 메달 리본 맛은 초코와 바닐라, 카라멜이 믹스된 맛이었다.

엄청 달 줄 알았는데 막상 먹어 보니 어느 것 하나 유난히 튀는 것 없이

세 가지의 맛이 은근하게 조화로운 맛을 냈다.


코튼 캔디 맛은 지금도 설명하기가 어렵다.

핑크 캔디와 퍼플 캔디가 믹스된 맛이라고 하는데,

정말 단순하게 한국 배스킨라빈스에 빗대어 설명하자면

이상한 나라의 솜사탕 맛에 퍼플 맛의 색소가 가미된 느낌이었다.


결론은 둘 다 맛있었다.



평소에 쇼핑은 물론 아이쇼핑마저도 즐겨 하는 편이 아닌데,

이마고 쇼핑몰은 정말 내 눈을 사로잡는 상품들이 많았다.



오랜만에 몸 좀 풀어볼까 하는 마음으로 농구 게임도 해 보았다.

내 전에 했던 사람의 기록이 15점이었다.

대체 얼마나 못 던져야 15점이 나올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는 김에 나는 최고 기록인 250점을 깨 보겠다는 야심찬 각오를 갖고 게임을 시작했다.


그러나 결과 135점...

200점도 기록하지 못한 내가 밉다.


 


게임을 마친 나는 출출한 배를 채우기 위해 오렌지 편의점으로 향했다.

코타키나발루에서는 오렌지 편의점이 눈길 닿는 곳마다 위치하고 있어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편의점에 들어가자마자 알바생들은 나의 코디를 보더니

관광객인 것을 알아채고 “Where are you from?”이라고 말을 걸었다.

이내 오렌지 편의점을 곳곳을 둘러보며 사진을 찍는 나를 향해

자신들의 모습도 찍어달라며 범상치 않은 텐션으로 포즈를 잡기 시작했다.



앞치마 유니폼까지 벗어던지는 알바생의 미친 텐션에 감동받았다.

갑자기 사장님 오셨으면 볼만 했을 듯.


어쨌거나 관광객을 향해 웃는 얼굴로 사진을 찍어달라고 하는 이들의 순수함이 너무 좋았다.



오렌지 편의점에서 간단하게 식사를 마친 나는

바다를 따라 걸으며 필리피노 마켓과 KK플라자에 다녀왔다.

 


필리피노 마켓에서 휠라 힙백을 차고 있던 한 소년이

알 수 없는 말로 친구들에게 내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

귀를 쫑긋 세우고 자세히 듣다 보니

‘Same FILA’ 라는 말이 들렸다.


그러고 보니 지금 내가 신고 있는 신발은 올 해 3월에 출시된 휠라의 신상 러닝화다.


짜식, 너도 휠라 이쁜 거 좀 아는구나?”


휠라 소년 일행은 익살맞은 표정으로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짓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귀여운 나는 휠라 소년에게 주먹 쥔 하이파이브를 건넸다.


We are same FILA friend.


괜히 샘솟는 휠라 동질감에 다른 친구들하고는 하이파이브 안 하려고 했는데

나머지 친구들도 졸졸 따라와 주먹 쥔 하이파이브를 하고 싶어 하길래

웃으며 모든 친구들과 주먹을 맞대 주었다.



코타키나발루에서 많이 보였던 긴꼬리원숭이 인형.

그리고 아직 진열 정리가 덜 된 듯한 식품 코너.



볼펜 잉크 테스트를 하는 종이에다가 방명록도 적어 보고 태국에서 완전 꽂혔던 딸기맛 환타도 구매했다.

딸기맛 환타는 오랜만에 먹어서인지, 아니면 이 곳이 태국이 아니어서인지

내가 기억하고 있는 맛과는 조금 다른 것 같았다.




이왕 걸어온 김에 제셀톤 포인트에도 들렀다.

나는 4번 창구에서 3일 뒤 브루나이로 갈 페리 티켓을 예매했다.

브루나이로 가는 페리 티켓은 4번 창구에서만 구매할 수 있다.


티켓을 손에 쥐고 나니 비가 와서 쁠라우띠가 섬에 가지 못했던 것이 떠올랐다.

쁠라우띠가는 비 때문에 일정을 늦추거나 환불을 요청할 수 있었지만

브루나이로 가는 배는 환불을 생각할 수 없다. 무슨 일이 있어도 가야만 한다.


만약 비가 온다는 이유로 브루나이에 가지 못하면 호텔 예약은 물론

싱가포르 일정, 말레이시아에서의 유심 카드 기간까지 꼬이게 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끔찍한 건 2학기 수강신청을 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나는 비가 와도 브루나이에 갈 수 있는지에 대해 확답을 얻고 싶었다.


“Can I take a ferry even if it rains?”


나의 질문에 직원은 대답했다.


“Yes.


브루나이 행 페리 티켓 [1] 63.6링깃(18,500)

코타키나발루라부안(8AM~11.30AM), 라부안브루나이(1.30PM~2.30PM)

라부안에서 브루나이로 갈 때, 라부안에서 별도로 터미널 이용료 5링깃(1,500) 추가 발생 / 2019.08 기준



호스텔로 돌아온 나는 새로운 방을 배정받았다.

호스텔 매니저께선 기존에 내가 쓰던 방이 대청소를 할 예정이라고 했다.

풀어놨던 짐을 다시 정리하고 새로운 방으로 옮겨야 하는 게 번거로워서 조금 불만이었는데

새로 배정받은 방은 바다 뷰가 보이는 넓은 창문이 있어서 바로 불만이 수그러들었다.



새로운 침대로 짐을 옮긴 나는 KK플라자에서 사 왔던 딸기맛 환타와 초콜릿을 먹으며 휴식을 가졌다.

행여나 누가 내 환타를 뺏어 먹기라도 할까봐 이름까지 적었다.



휴식을 가지며 나는 호스텔 매니저분께 괜찮은 마사지 샵의 추천을 부탁드렸다.

그러자 매니저분께선 일말의 고민도 없이 티야 마사지 샵을 추천해주셨다.

이마고 쇼핑몰에서도 가까우니 찾아가기 어렵지도 않을 거라고 하셨다.


나는 초콜릿을 다 먹고 나면 티야 마사지 샵으로 가서 발마사지를 받고,

탄중아루 비치에 가서 선셋을 보기로 했다.

탄중아루 비치는 루카스와 중국인 여사친들과 한 번 다녀왔지만,

당시 가야 스트리트 야시장에 가서 저녁을 먹기로 한 탓에

더 오래 선셋을 보지 못했던 것이 내심 아쉬웠기 때문에

여유있는 오늘의 시간을 빌미로 한 번 더 다녀오기로 했다.



호스텔로부터 걸어서 5분 위치에 있던 티야 마사지 샵. 당일 예약은 밤 10시에 가능하다고 하셨다.

나는 10시로 예약을 잡았고 그 전까지 탄중아루 비치에 가서 선셋을 본 후

필리피노 마켓으로 가서 야시장 먹방을 즐기기로 했다.


우선 나는 탄중아루 비치로 향하기 전,

위즈마 메르데카로 가서 가지고 있던 10만원의 비상금 중 5만원을 추가로 환전하기로 했다.



그랩을 이용하여 탄중아루 비치로 향하는 중, 기사님께서 내게 여행 일정을 물어보셨다.

나는 3주 동안 여행을 다닐 예정이며 다가오는 목요일, 브루나이로 떠난다고 하자

브루나이를 여행지로 정하게 된 이유가 있냐고 또 한 번 질문을 주셨다.


이에 나는 한국의 <배틀 트립>이라는 예능 프로그램에서 브루나이를 소개한 방송을 보고

꼭 브루나이에 가 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렇다. 나는 군대에서 <배틀 트립>의 브루나이 편을 굉장히 인상깊게 보았다.





방송에서 브루나이는 남자 우정 여행지로 각광받았다.

사실 나도 브루나이만큼은 유쾌한 친구들과 함께 가고고 싶었는데

이번 나의 여행 일정이 너무나 길었던 데다가 비용과 시간.

또, 우선은 혼자만의 시간을 가장 원했던 나의 여행 이유를 바탕으로 혼자서 브루나이에 가게 되었다.



탄중아루 비치에 도착한 나는 여유롭게 하늘을 바라보며 선셋을 눈에 담았다.

날씨가 흐렸던 탓에 황홀할 정도의 붉은 선셋을 보지 못한 게 약간 아쉬웠다.



그래도 탄중아루 비치는 아름다웠다.

뜨겁게 지는 노을까지 못 보진 않았다.


홀로 비치를 걸으며 선셋을 보다 보니 어느새 배가 허기지기 시작했다.

나는 허기진 배를 채우러 탄중아루 비치의 입구로 갔다.

그 곳에는 즐비하게 줄서있는 길거리 음식들이 관광객들의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그러던 중, 3층 주스라는 독특한 주스가 눈에 띄었다.

3층 주스를 주문하려고 한 가게로 들어가려고 하는 순간, 누군가 내게 말을 걸었다.

 

한국 분이시죠?”


심지어 한국말이었다.



혹시 이제 일정 있으세요?”

(한국인 남자)

 

이따가 10시에 마사지 예약이 되어 있어서 그 전까지 야시장에 잠깐 들를까 했어요.”

(영완)

 

! 야시장이요? 혹시 그럼 그랩 타고 가세요?”

(한국인 남자)

 

, 저 여기서 간단하게 뭐 하나 먹고 바로 그랩 타고 가려구요.”

(영완)

 

, 다른 게 아니라 저희 일행이 2명 더 있는데 핸드폰이 죽어서 그랩을 못 부르고 있었거든요.

저희도 야시장 갈 예정이었는데 괜찮으시면 그랩 불러서 같이 타고 갈 수 있을까 해서요.

차비는 저희가 낼게요.”

(한국인 남자)

 

정말요? 그럼 저야 감사하죠.”

(영완)

 

혹시 숙소가 어디세요?”

(한국인 남자)

 

저는 이마고 쇼핑몰에 있는 호스텔인데 C동이에요.”

(영완)

 

“(놀란 표정을 지으며) 정말요? 저희 이마고 쇼핑몰 A동이에요!”

(한국인 남자)

 

“(빵 터지며) 진짜요? 대박!”

(영완)

 

주스 뭐 드실 거에요? 주스까지 저희가 살게요.”

(한국인 남자)

 

감사해요. 3층 주스 하나 마실게요. 괜찮으시면 야시장 일정에 제가 조인해도 괜찮을까요?

같이 가면 야시장에선 제가 간단하게 식사 한 끼 살게요.”

(영완)

 

좋죠. 그럼 여기서 주스 마시고 저희 같이 야시장으로 가요.”

(한국인 남자)


그들 일행은 스물 여덟 살 2명과 스물 아홉 살 1명으로 다 나보다 형들이었다.

형들은 어렸을 때, 교회에서 만나 20년 넘에 우정을 쌓아온 사이였고

이번에 우정 여행으로 코타키나발루에 오게 되었다고 했다. 



형들이 사 주신 3층 주스를 마신 후 우리는 그랩을 타고 필리피노 마켓으로 이동했다.


이동하는 내내 형들은 내게 연신 감사함을 표현해주셨다.

영완 씨 아니었으면 저희 진짜 답 없을 뻔 했는데 너무 다행이에요.”


필리피노 마켓에 도착하자 나는 형들에게 먹고 싶은 길거리 음식을 고르라고 했다.

그러자 형들은 낮에 웰컴씨푸드를 배부르게 먹은 상태라

지금 음식이 많이 들어가지 않는다며 내가 먹고 싶은 음식을 고르라고 하셨다.


서로 간의 타협 끝에 우리는 꼬치 구이와 닭날개를 먹기로 했다.



나는 고등학교 때, 급식을 먹을 때마다 친구들로부터 항상 듣던 말이 있다.


영완아, 너 진짜 맛있게 먹는다.


나는 그냥 평상시 먹는 대로 먹는 건데 주변에서는 모두가 미리 짜기라도 한 것처럼

내가 음식을 먹을 때마다 항상 맛있게 먹는다는 말을 해 주었다.


필리피노 마켓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형들은 내게 말했다.



“진짜 맛있게 드시네요. 저희 아까 웰컴씨푸드 먹고 와서 진짜 배부른데 닭날개가 또 먹고 싶어지네요.

“먹방 BJ 이런 거 할 생각 없으세요? 진심으로 대박 날 것 같은데...

“BJ 하시면 저희가 바로 구독할게요!


먹방 BJ 추천 또한 정말 많이 받던 제안 중 하나다.

내가 잘 먹긴 하나 보다.

친구들이 아닌 처음 만난 사람들이 내게 먹방 BJ를 권하니 잠시나마 솔깃했다.


용돈벌이 시작해볼까..?’


닭날개 먹방을 끝낸 우리는 필리피노 마켓을 본격적으로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 때, 한 꼬마가 우리에게 망고를 건넸다.


“먹어볼래?



유창한 한국어 실력과 예사롭지 않은 망고 깎는 실력을 보유하고 있는 이 꼬마.

알고 보니 이미 인스타그램에서 한 차례 스타덤에 오른 적이 있던 꼬마였다.



거슬러 줄 잔돈이 없었는지 파이브(5) 링깃’ 대신 오(5) 링깃’을 찾는 이 꼬마..

이런 한국어 대체 어디서 배웠으며 누가 알려준 것일까.


옆에 있던 또다른 한국인 분이 말씀하시길,


“인생 2회 차인 것 같은데 전생에 한국인이었나.


덕분에 형들도 웃고 나도 웃었다.



밤은 더욱 깊어졌고 우리는 왁자지껄 수다를 떨면서 필리피노 마켓에서 티야 마사지 샵까지 걸어왔다.

형들이 마사지를 받고 싶어 해서 같이 티야 마사지 샵에 데리고 갔었는데

이미 예약이 다 차있다고 해서 아쉽게도 같이 마사지를 받을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형들은 숙소로 돌아가고,

나는 원래 예정대로 마사지를 받기로 했다.


이대로 헤어지기 아쉬웠던 우리는 함께 셀카를 찍기로 했다.



형들과 함께 찍은 사진을 보내주기 위해 일행 중 한 명이었던

대니형(탄중아루 비치에서 먼저 내게 말을 건네주신 형)과 카카오톡 아이디를 주고받았다.


그런데 대니형의 카카오톡 프로필뮤직이 콜드플레이의 노래였다.

아까 낮에 만났던 휠라 꼬마처럼 괜히 또 동질감 느껴져서 기분 좋았다.



형들과 헤어진 나는 티야 마사지 샵으로 자리를 옮겼다.

원래 예약 시간보다 조금 빨리 방문한 탓에 대기실에서 조금 기다렸다가 마사지 방으로 이동했다.


 


나는 아로마 테라피 마사지에 발 마사지가 더해진 90분 짜리 마사지를 받았다.

원래는 발 마사지만 받으려 했는데 이왕 받는 김에 전신 마사지도 같이 받고 싶었다.



순식간에 90분이 흘렀다. 마사지가 끝나고 나니 몸이 개운해졌다.

그런데 어딘가 아쉬운 느낌도 들었다.


태국에서 마사지를 받을 때는 몸이 녹는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이번에는 몸이 조금 풀린다는 느낌 정도에서 그쳤다.


나중에 다른 사람들과 후기를 공유해 보니

같은 마사지샵에서 마사지를 받아도 누가 마사지를 하느냐에 따라서 후기가 천차만별로 나뉜다고 한다.


나를 마사지해주셨던 분이 못 한다는 느낌을 받지는 않았는데

그래도 태국의 수준까지는 미치지 못했나 보다.


티야 마사지 샵 아로마 테라피 마사지+발 마사지[1인] 118링깃(약 34,000원) / 2019.08 기준




호스텔에 도착하고 나니 시간은 이미 자정을 넘어가 있었다.

모든 투숙객들이 곤히 잠에 든 고요한 호스텔에서의 밤.

아무 것도 정해진 것 없던 오늘의 일정도 지내다 보니 어떻게든 채워졌다.

그런데 무계획으로 보낸 하루 치고는 남부럽지 않을 정도로 알차고 행복한 기억들로 하루가 채워져 있었다.



나는 과일을 정말 싫어한다.

어느 정도냐면 일단 한여름에 수박을 먹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 반응에 많은 사람들이 놀라며 “왜?” 라고 궁금해 하면

렇게 맛없는 음식을 왜 여름의 별미랍시고 먹는지를 모르겠다.”고 대답한다.


학교 그리고 군대에서도 식사 메뉴에 과일이 나오면 한 입도 대지 않은 채 다른 사람들에게 주었고,

어릴 때 집에 부모님의 친구분들이 선물로 과일 세트를 사 오려고

부모님에게 애들 좋아하는 과일 뭐 있어?” 라고 물어보면

부모님은 극구 손사래를 치면서

우리 집 새끼들 과일 사 오면 입에 대지도 않는다.”며

아무 것도 사 오지 말고 제발 빈 손으로 오라고 하실 정도였다.

기껏 돈 들여서 비싼 과일 사 와도 결국엔 우리집에선 버리게 될 거라면서.


그 정도로 과일을 싫어하는 내가 대니형 일행으로부터 그랩을 불러 준 감사함의 대가로 망고를 선물받았다.


그런데, 정말 이상하게도 너무나 고마웠다.

그 선물이 과일이라서 그런 걸 넘어

나는 그저 여행이라는 순간에서 행복한 순간을 함께 보냈다고만 생각했는데

형들은 그 순간을 감사하게 생각해서

나에게 말레이시아에서만 받을 수 있는 과일을 선물해 준 것이 몹시 감동적이었다.


망고를 받을 수 있어 너무 기뻤지만

좋은 형들과의 인연이 시작되어서 더 기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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